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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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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MBC 스페셜」1부 <한일축구, 애증의 드라마 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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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일본의 월드컵을 공동 개최를 계기로 MBC는 지난 반세기 동안 쫓고 쫓기는 숙명의 라이벌 관계에 있는 한일 축구의 궤적을 짚어보고, 이를 통해 한일 간의 새로운 동반자적인 관계를 찾아보는 2부작 다큐멘터리 「한일 축구, 애증의 드라마 80년」을 5월 19일과 26일에 각각 방송한다.

제1부 <한국을 잡아라>에서는 한국 축구에 번번이 밀렸던 일본 축구의 역사와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한 두 나라의 치열한 노력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제2부 <숙명의 라이벌>은 80년 동안 영원한 맞수로 엎치락 뒷치락 선수 생활을 해온 한일 스타 플레이어들의 경쟁 구도와 우정을 살펴본다.

1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부 <한국을 잡아라>


1921년 한국과 일본에 정식축구가 도입된 이후 80년간 계속돼온 한일축구 격투의 역사. 역사의 한을 축구로 풀겠다. 투지와 근성으로 뭉친 한국의 절대적인 우세 속에 일본축구는 수십년간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한국을 따라잡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온 일본과 일본만은 어떻게든 이겨야한다는 한국. 이들은 오랜 세월 쫓고 쫓기는 애증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현해탄에 빠져죽어라!

한국과 일본의 국기를 건 첫 국가대항전이었던 54년 스위스월드컵 극동예선전. 당시는 반일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수들의 국내 입국을 반대하는 바람에 홈 앤드 어웨이 방침에도 불구하고 두 경기 다 일본에서 열릴 수 밖에 없었고, 만일 일본과의 경기에서 진다면 현해탄에 빠져죽겠다는 각오로 일본 원정길에 나서야했다.

결국 1승 1무 한국 승. 한국 선수들은 무사히 현해탄을 건너올 수 있었고,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으며 단번에 국민적 영웅이 됐다.

일본 국가대표팀, 최초로 한국에 오다!

한국에서 열린 최초의 한일전은 61년 칠레월드컵 예선전. 일본팀이 최초로 한국에 와서 경기를 하게 되자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한 대한체육회는 헌병대, 기마대, 경찰까지 총동원해서 엄격하게 경기장 질서를 유지했고, 일본 대표팀은 경기장이었던 효창구장 안을 버스를 탄 채 들어가야 했다. 결과는 2대 1 한국 승리. 경기는 무사히 끝났고 관중들은 박수를 치며 일본 선수들을 보내줬다.

'10센티의 행운' 전 일본이 안도했다!

모든 선수들이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골로 꼽는 68년 멕시코올림픽 예선 한일전 당시 김기복 선수(현 경찰청 감독)의 강슛!
당시 출전했던 선수들은 하나 같이 크로스바에 선명하게 찍혀있던 공자국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한국 선수들이 한동안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안타까웠다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3대 3 팽팽한 긴장 속, 경기 종료 직전에 마지막으로 날린 중거리 슛은 크로스바를 맞고 다시 튀어나오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후에도 크로스바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한국(?) 월드컵 8강에 오르다? - 중앙정보부 소속 국가대표 '양지'팀

66년 영국월드컵, 북한의 세계 8강 돌풍!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남북한이 이념과 체제로 극도의 대결상태였던 66년 당시,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 소식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을 능가할 수 있는 최고의 팀을 키우기 위해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중앙정보부에서 직접 축구 국가대표팀인 양지팀을 운영하라고 지시했는데….

덕분에 선수들은 105일간의 유럽전지훈련을 다녀오는 등 다른 어느 때보다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선수들이 하루 세끼 모두 갈비를 먹을 뻔한 사연, 선수들 전원에게 포상으로 주려던 집 한채와 10만원의 축하금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임국찬의 패널티킥 실축 사건. 그리고 일본을 이기기 위한 한국 선수들의 일본 최고의 선수 가마모토 구타 작전 등 양지팀과 청룡팀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어본다.

32년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 일본, 독을 품다!

85년 11월, 도쿄에서의 통쾌한 승리 후 잠실에서의 2차전 승리로 32년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 온 국민은 열광했고 대통령도 잠실 경기장으로 달려왔다. 반면 일본은 초상집이 됐고, 이때부터 일본은 입에 칼을 물고 또다시 한국 타도에 기치를 올렸다.

"월드컵을 개최하면 한국을 이기지 않고도 월드컵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본이 월드컵 개최하겠다는 원대한(?) 뜻을 품은 것도 이 시합에서 진 다음 부터였고, 한국을 잡기 위해 프로축구 출범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경기에서 패배한 직후였다.

도하의 비극! vs 카타르의 기적!

93년 10월, 94년 미국 월드컵 예선 한일전. 카타르 도하에서의 1대 0 충격적 패배는 일본과의 피말리는 축구 경쟁의 시작을 알린 전주곡이었다. 미우라 라는 일본 최고의 스타 탄생, J리그 출범과 일본 축구의 성장. 당시 경기를 뛰던 선수들은 일본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일전 패배로 본선 진출 위기에 몰렸던 한국팀은 일본과 이라크 경기가 2 : 2 로 무승부로 끝나면서 골득실차로 힘겹게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당시 이라크의 도움으로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주한 이라크 대사관에는 전국에서 감사의 전화가 폭주했고, 한국은 이날을 "카타르의 기적"으로 기억한다.
한편 한국을 이기고도 월드컵 진출이 좌절됐던 일본 전역은 울음바다를 이뤘고, "도하의 비극"이라는 드라마틱한 제목이 일본 축구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된다.

'골! 골! 골이에요!' 기적의 7분 드라마!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 한일전 1차전 당시, 서정원의 동점골과 이민성의 역전골. 1대 0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38분 이후 연이어 터진 드라마 같은 두 골로 한국팀은 도쿄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연이은 승리로 월드컵 본선 진출 확정! 하지만 잠실 2차전에서의 2대 0 패배. 사상 첫 안방에서의 패배로 일본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고, 한국팀은 고의패배설, 승부조작설에 휩싸이게 되는데….

<제1부 한국을 잡아라>에서는 한국과 일본 양쪽 선수들의 증언을 통해 역대 한일전에서의 감격의 순간과 아쉬움의 순간, 그에 얽힌 에피소드 등 지금까지의 한일 축구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예약일시 2007-03-07 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