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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직후 세계 여론은 15년에 걸친 기나긴 살육의 전쟁을 이끌어온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응징을 요구하고 있었다. 연합국 중 유일하게 일본의 직접적인 침략 피해를 입었던 호주 정부는 일찌감치 전범 리스트를 제출하면서 46인의 전범 중 일곱 번째 전범으로 천황을 올려놓은 상태였고, 미국 상원위원은 전범으로서의 천황의 체포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처럼 천황 히로히토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휘한 최고 책임자로서 최소한 사형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세계는 단 한번도 천황이 기소되거나 증인석에 오르는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아시아 전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걸쳐 49개 연합국이 참전해 무려 5천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의 전쟁 범죄를 평화와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대에 올린 극동국제군사재판, 그러나 이 재판은 그 엄청난 전쟁범죄의 지극히 일부만을 다루고 있었다.
재판은 전쟁을 기획하고, 수행한 전쟁지도자 25인을 기소하고 전원 유죄를 선고했지만 일본의 최고 통수권자로 전쟁을 이끌어 갔던 천황의 전쟁책임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나치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생체실험에 비견될 만한 731부대의 만행을 비롯해 아시아의 점령지에서 벌어진 무차별한 민간인 학살과 위안부 동원은 물론이고 식민통치를 통한 수탈 및 강제동원 등은 완전히 제외시켰던 것이다.
세계 여론을 배반하고 천황을 무대 뒤편으로 도피시킨 이 엄청난 음모의 주역은 누구인가? 11개국이나 되는 연합국이 참가한 도쿄전범재판이 축소 은폐되어 진행된 까닭은 무엇일까? 수많은 의혹으로 점철된 도쿄전범재판에 흑막에 대해 관련 증인들의 증언과 새롭게 발굴된 문서를 토대로 그 진실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지 말라"
- 워싱턴을 움직인 맥아더의 비밀전문 천황 처벌에 대한 세계적인 여론이 들끓고 있을 무렵,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전권을 부여받은 맥아더 최고사령관이 천황의 전범 처벌 여부에 관해 워싱턴에 보낸 비밀전문이 발견됐다. 46년 1월 24일자로 된 이 문서는 45년 11월 30일, 천황의 관대한 처리를 경계하는 워싱턴으로부터 전분에 대한 답신으로 보낸 문서였다.
이 전문에서 맥아더는 놀랍게도 "천황의 전쟁 범죄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으며 그를 전범으로 처벌한다면 일본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따라 백만 대군의 희생이 예상되는 새로운 전쟁을 치르게 될 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다.
그 자신이 필리핀 전투를 통해 일본군으로부터 치욕스런 참패를 경험했던 맥아더. 자신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겨준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천황의 전범을 응징하기 전에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했던 맥아더는 왜 세계적인 여론과 워싱턴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판단을 내렸어야만 했던 것일까?
전쟁의 영웅으로만 남고 싶지 않았던 맥아더, 7천만 일본국민들에게 천황을 대신하는 새로운 신으로 인정받고, 나아가서는 전 세계를 휘두르는 최대의 강국,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던 맥아더의 빗나간 야심이 어떻게 2차 대전 최대의 전범이었던 천황을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은폐시켜나가는 지를 추적해봤다.
- 냉전시대, 극동아시아의 對 공산주의 방파제, 일본을 사수하라
전범에 대한 공식적인 기소절차를 몇 달 앞 둔 상황에서 트루먼은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던 조셉 배리 키낸 수석감사에게 은밀한 친서를 보내 천황의 기소면제 방침을 주지시켰다.
당시 재판에 참가했던 50여 명의 미국 대표단 중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 있는 미국측 검사이자 당시 트루먼의 친서를 직접 키낸 검사에게 전달했던 장본인, 로버트 다너하이의 증언은 천황을 전범리스트에서 제외시킨 것이 당시 맥아더의 독단으로만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으며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2차 대전을 종전시킨 최대의 공이 미국의 원자폭탄에 돌려졌던 당시의 상황에서 실상 재판의 모든 과정을 장악했던 미국, 재판에 참여했던 11개의 연합국들의 피해는 물론 자국의 피해마저도 축소시켜나가면서까지 천황을 사면시키고, 일본의 전쟁범죄를 은폐시켜 나간 의도는 무엇인가?
냉전시대로 접어든 당시 상황에서 일본을 소련의 진출을 저지하는 최후의 방파제로 삼고자 했던 미국과 그를 통해 합의를 이뤄나간 서구 연합국들의 제국주의가 재판에서의 식민지 문제를 도외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 "모든 죄는 도조 히데키에게…"
기소는 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천황이 완전히 사면될 수는 없었다. 재판정에는 천황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해온 연합국의 판,검사들이 있었고, 천황의 무죄는 무려 419명이나 되는 증인들을 통해 입증되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2년 반에 걸친 지루한 재판의 과정에서 무려 419명의 증인이 법정에 섰지만 천황의 책임을 입증해준 증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그 뒤에는 미국의 치밀한 연출과 사전 준비가 있었던 것이다.
최초 공개는 일본 법무성의 "극동국제군사재판관계 청취자료"중 면접조서에 따르면 미국측 수석검찰관 키낸의 사주를 받은 변호사 시오바라와 도조 사이에 천황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사전각본연습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써내려간 이 문서에는 재판에서 도조 히데키의 심문을 맡았던 키낸 검사의 질문과 그에 대해 도조가 답변해야 할 내용이 문답형식으로 상세히 기술돼 있었고, 재판은 물론 그 시나리오에 적힌 대로 완벽하게 재연됐다.
▶"나는 신이 아니다" -천황의 인간선언과 미국의 연출
세계 언론은 물론이고 일본 내에서도 천황의 전범기소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맥아더는 천황의 대외적인 이미지 변신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바로 히로히토의 인간화 선언 조서.
1946년 1월 1일에 자신이 더 이상 신이 아님을 주장한 히로히토의 인간선언 조서는 맥아더의 '인간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GHQ가 먼저 영문판으로 작성하고 이를 일본판으로 번역하여 외부에 발표했다. 이는 일본인들 위한 선언이라기보다 오히려 세계 여론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화 선언의 일환으로 지방순례가 시작되고 미국의 철저한 계획 하에 지방을 돌아다니며 천황은 자신의 전범으로서의 이미지를 서서히 불식시켜 나간다.
▶731부대와 전범 히로히토
천황의 불기소와 더불어 도쿄전범재판이 은폐시킨 또 하나의 진실, 731부대. 14명을 생체실험한 731부대의 의사 유아사 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731부대는 천황의 부대였으며 천황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라고 한다.
또 731부대의 또 다른 증언자 시즈노카는 "천황은 유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천황은 물론이고 731부대를 이끌었던 이시이시로를 비롯한 말단의 부대원들의 거의 대부분은 재판에서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731부대의 마지막 증언자들에게 듣는 731부대의 실상과 그들이 주장하는 천황의 전쟁범죄,그리고 731부대의 만행이 철저히 은폐되는 과정에서의 미국의 음모를 파헤쳐본다.
▶천황의 이름으로 죽어간 조선인 포로감시원
일제의 강제징용이 기승을 부리던 1942년. 3000명의 조선 청년들이 "KOREAN GUARD"란 이름으로 연합군 포로 감시를 위해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이들은 종전 이후 포로학대를 이유로 현지에서 B, C급 재판에 기소돼 148명이 유죄 선고를 받고 그중 23명이 사형에 처해진다. 포로의 뺨을 때린 죄로 10년형을 받았다는 김완근씨의 증언과 변호사와 통역도 부족한 상태로 치러졌던 B, C급 재판의 실상을 전한다.
최초공개된 "시모무라 통달"에는 "연합군의 심문시 모든 책임을 조선인과 대만인에게 떠넘기라"라고 기록돼있다. "시모무라 통달" 속에 담긴 일본군의 의도는 무엇이며 싱가포르에장끼 형무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사형을 당했다는 23명의 조선 청년들은 왜 천황의 이름으로 죽어간 것인가?
이밖에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의 GHQ자료실에 남아있는 이름 모를 조선인전범의 자료를 공개하고 더불어 친일파 아닌 친일파로 일본에 남아 애달픈 망향가를 부르는 조선출신 전범들을 외면하고 있는 일본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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