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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 공식발표한 북파공작원의 수는 만여 명('53-'72). 이 가운데 7,726명이 사망, 실종됐다. 정전협정 위반문제로 비밀시됐던 북파공작원의 존재가 수면위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간 북파공작원들은 침묵 속의 희생만을 강요받아왔다. 모집될 당시의 약속은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고, 군인신분조차 주어지지 않아 사망과 부상에 대한 보상이 전무했던 것은 물론, 목숨을 건 활동 뒤에도 병역기피자로 몰리기도 했다. 더욱이 사회로 복귀한 이후, 이들에겐 평생 감시와 해외출국 금지 등 여러 가지 제약이 따라다녔고, 결국 이들에게 남은 것은 생활고와 가정파탄, 정신질환, 자살 등이었다. 50년대부터 70년대 이후까지 국가에 의해 북한에 보내졌던 공작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그들의 삶을 조명해 본다.
* 축소, 은폐된 수치 - 군의 발표 7,726명
지금까지 군당국이 발표한 수치는 7,726명. 이들에 대한 기록은 정보사령부가 공작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계약일시·해고일시·고향·가족·근무일지·작전성과 등 모든 사항을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해 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이동 망월사 충렬각, 봉은사 , 영혈사 등 3곳에 봉안 된 위패 숫자뿐 아니라 희생된 미국 CIA소속의 공작원들 수치까지 합하면 희생자 수는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게 살아남은 북파공작원들의 주장이다.
*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모집령 - 한국판 마타하리 한국전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여성 공작원들은 당시 영부인이었던 프란체스카에 의해 모집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프란체스카와 친분이 있는 여배우거나 이북 출신 여성들이었다. 최고의 후원자인 영부인의 지원으로 여성공작원들은 적지에 침투해 여성을 무기로 적의 정보를 빼내는 역할을 해냈다. 그들의 존재는 한국전 당시 미공군특수부대 출신인 아더홀트 준장의 증언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 북파공작원들의 물색관 증언 - 지켜지지 않은 국가의 약속
68년 당시 교도소에 위장 잠입해 북파공작원을 물색한 현역 군인 신분이었던 오모씨에 따르면 국가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전과 기록 말소와 억대의 보상을 약속했었다고 한다. 물론 목숨을 대가로 하는 만큼 또 국가를 상대로 하는 약속이니만큼 북파공작원들은 그 약속을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사회 복귀 후 .군기피자로 몰려 이중 군 생활을 한 공작원들도 있다.
*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 감춰진 대북 특수부대의 실상 공개 북파공작원들은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북한에 거주하며 지하망 구축이나 정보 수집 등의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단독 침투와 팀을 이룬 침투를 했는데 팀을 이룬 임무일 경우 동지가 부상을 당하면 증거 인멸을 위해 사살을 해야 했다고 한다. 또 훈련기간 동안 받은 살인, 폭파, 요인납치 등의 인간성 말살 세뇌 교육은 이들이 사회로 복귀한 후 제대로 사회 생활을 할 수 없게 했다. 결국 이런 생활로 인해 북파공작원들은 가정파탄, 자살, 정신 질환 등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 살아남은 자들의 바람과 노력
버려진 북파공작원들은 외친다. 군당국이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북파공작요원을 선발 훈련시켜 인간병기와 같은 소모품으로 사용하고 나서는 인간 폐품처럼 버린 자신들의 인생을 보상해야한다고…. 밀실과 같은 훈련소에서 3년에서 5년 가까이 갇혀 생활해야 했던 자신들의 젊은 날을 보상해야 한다고. 또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해 애끓는 세월을 보낸 유가족들의 한 맺힌 오열은 오늘도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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