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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에서는 29개 대학 2000여명의 대학생들이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이라는 전국적 학생조직의 결성식을 열었다. 그리고 나흘 뒤 같은 장소에서 경찰은 8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서건 30호'라는 작전 아래 1,525명의 학생들을 연행하였고, 사법부는 그 중 1,290명의 학생들을 전격 구속하였다. 1986년 그들은 왜 건국대학교에 모여들었으며, 3박 4일 동안 그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
단일 사건으로 사상 최대의 구속자수를 기록한 이 사건을 두고 검찰에서는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이라고 이름지었다. 학생들이 작성한 유인물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 까부수자 6·25는 반미 민족해방투쟁이다" 라는 등의 주장이 나오고, 발족선언문에는 북한의 대표적 혁명가극 '피바다'의 마지막 구절까지 그대로 인용되었다는데…. 당시로서는 금기시 된 반미구호와 이러한 친북적 성향의 문구들은 기성세대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대검찰청 공안부장 최상엽과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장 최환의 인터뷰를 통해 검찰측에서 본 당시 사건의 성격을 들어본다.
▶ 시민 여러분,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10월 30일 학생들과 경찰의 대치가 사흘째 계속되던 날 TV에서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한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북한의 수공위협설과 함께 건국대에 있는 학생들은 다시 북한의 조종에 놀아나는 철부지들로 소개되었다. 단전에 단수까지 이어진 학생들의 고립 상태. 헬기에서는 자수를 권유하는 전단지가 뿌려지고 학부모들의 애타는 설득 방송이 이어지는 가운데,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그들이 농성을 풀고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친북·친공이라는 사회적 비판에 그들은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 1986년 10월, 금강산댐과 공포정치 85년 말부터 급속히 번진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 그리고 공공연하게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방했던 미국에 대한 반대. 그 속에서 분신이라는 극한의 방식을 선택한 학생들. 그리고 남은 학생들의 분노. 정권 타도의 구호는 점점 높아져갔고, 정권의 대응도 보다 강력해졌다. 상지대 불온 유인물 사건,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결성 기도 사건, 그리고 금강산댐까지…. 10월의 정국은 얼어붙었고, 결국 10월의 마지막날 건국대에서는 경찰의 사상 최대 진압 작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그것은 당시의 진압 경찰에게도 학생에게도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 기자가 쓰지 않은 기사
당시의 신문이나 TV는 연일 건국대를 점거하고 있는 학생들의 난동(?)에 주목하고 있었다. 직선제 개헌과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던 그들의 구호는 '원쑤'나 '피바다'에 묻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 당시의 취재 기자는 직접 쓴 적이 없는 표현이 기사화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학생들에 대한 정권의 인식은 어떠했으며, 85년 논의되었던 학원안정법의 취지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본다.
▶ 용공이냐 애국이냐 체제 전복을 노리는 불순세력! 민주화를 열망한 청년 학생. 학생들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고 있지만, 시간은 흘러 당시의 학생들은 30대 후반의 평범한 시민이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1986년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왜 그 날을 뒤돌아보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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