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3김의 정치역정을 통해 오늘날 한국의 정치구도가 어떤 과정에서 형성되었나를 보여주려 한다. 3부에서는 87년 6월의 시민항쟁으로 이뤄낸 대통령 직선제를 앞에서 분열해 버리고 마는 양김의 정치행보와 그로 인해 고착되어 버린 지역주의 및 파벌주의의 폐해를 살펴본다. 또한 87년의 분열 이후 다시 화합하지 못 하고 정권창출을 위한 3당 합당을 강행함으로써 점점 더 혼란으로 빠져드는 정국의 변화를 보여준다.
2. 주요내용
1) 경쟁의 시작, 87년 대통령 직선제
"군부가 비토하니 내가해야 한다" vs "민주화를 위해서 제일고생, 마지막 기회다"
87년 6월 항쟁은 시민들이 이뤄낸 값진 성과. 이제 군정종식과 정권교체가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 또한 양김에게도 직선제를 통해서 대권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야권의 후보 단일화가 필수적인 과제였다.
6월 항쟁으로 고조된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가 전국을 휩싸는 가운데 군정종식 이후의 대안세력인 양김의 지지도는 날로 높아져만 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열광하는 시민들이 있는데 대통령 후보직을 양보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다. 7월 9일의 DJ 사면복권 이후 양김은 대통령 후보직을 놓고 한치도 양보 할 수 없는 팽팽한 접전을 벌인다. 그뿐 아니라 유신본당임을 자처하며 정계에서 한동안 떠나 있던 JP가 등장하여 충청권을 결집시키기 시작한다. 이제 야권은 3분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야권의 후보쟁탈이 한참일 때, 여권은 6·29 선언으로 이미지를 쇄신한 노태우를 보통사람으로 가장시켜 선거를 차분히 준비해 나간다. 사실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양김의 분열은 그들이 바라는 구도였고, 또한 어느 정도 양김의 분열을 예상하고 있던 터였기에 그들의 세몰이는 점점 가속도를 낸다.
대통령직에 대한 열망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간절한 것인가. DJ의 분당으로 양김은 끝내 단일화에 실패하고 선거는 4파전이 된다. 결과는 노태우의 승리.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군정종식도, 정권교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국민들은 다시 한번 군정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같은 동서갈등으로 불리는 치열한 지역주의만 남겨졌다.
2) 돌이킬수 없는 분열의 결과 - 3당 합당
88년 여소야대 상황. 노태우 정권 취임 이후 치러진 4·26 총선은 87년 대선에서 고착된 지역주의의 구도를 확연히 드러내는 결과를 보여줬다. 여권이 패배하고 영남, 호남, 충청권을 야권이 장악하며 여소야대의 구도가 되었다. 또한 DJ의 평민당은 호남지역을 석권하며 야권에서 제일 많은 의석수를 차지해 공히 제1야당이 된다. 야권의 승승장구로 대법원장 동의안 부결, 5공 청문회 등 우리 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에 의한 국회가 진행된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여소야대 구도를 바꾸게 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어차피 5년 후면 또 다시 정권을 쥘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정계의 보스들은 이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제1야당 총재로 부상한 DJ는 유화적인 정책을 펴면서 자신의 대권가도를 착실히 달리고 있었다. JP 역시 여권과 합당할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몸이 달은 쪽은 여권과 YS. 여소야대 상황에서 무엇 하나 맘대로 일을 하지 못 했던 여권은 거국적인 정계의 개편을 생각중 이었다. 또한 제2야당으로 전락한 YS 역시 다음 정권을 확실히 잡기 위한 결정적인 기회가 필요했다. 야권의 열기에 눌려 있던 여권은 정계의 대 개편을 위해 야권의 수뇌부들과 협상을 계속한다. 결국 손을 내민 쪽은 YS.
90년 1월 22일에 민정, 민주, 공화 3당 합당이라는 온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거대 야당의 탄생으로 국회는 파행적인 운영이 연이어 일어나고 여소야대의 상황을 만들어 준 국민들에게는 씯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정치혐오와 허무주의를 배태한다. 점점 혼란으로 치닫는 정국. 이러는 가운데 합당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과 평민당의 통합으로 판세는 양당구도가 된다.
3) 승자와 패자 - 92년 대선
혼란한 정국 가운데도 어김없이 대선의 계절은 돌아왔다. 노태우 5년 정권이 끝나 가고 있었고 이제 다음주자를 결정해야 될 시간이 된 것이다. 92년의 정국은 양김 외에 재벌회장 정주영의 정계 진출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정주영의 국민당은 그동안 양당의 파벌싸움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높은 지지를 얻게 된다.
극단적인 지역주의의 표출과 상대비방,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가운데 92년 대선이 진행된다. 정주영의 출현으로 선거는 3파전의 양상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양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선거 막판, 부산의 한 음식점에서 YS를 대통령으로 밀자는 기관장들의 회의가 국민당에 의해 공개된다. 일명 초원복집 사건. 고위 공직자들의 이런 집단 이기주의적인 행동은 굉장한 비난을 받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 사건은 TK와 PK로 양분되던 영남 지역을 결집시키는 역풍을 불러일으킨다.
결과는 YS의 승리. 승자가 기뻐하는 가운데 패자는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세 번이나 고배의 잔을 마신 DJ가 물러나면서 이제 삼김시대는 막을 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3. 주요출연자
이용희 (전 평민당 부총재), 설훈 (전 DJ 비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김명윤 (전 통일민주당 고문), 김상현 (전 통일민주당 의원), 김도현 (전 통일민주당보 주간), 최기선 (전 통일민주당 의원), 김동주 (전 통일민주당 의원), 김광일 (전 통일민주당 기회조정실장), 노무현 (전 통일민주당 의원), 김정길 (전 통일민주당 의원), 조순형 (전 통일민주당 의원), 박철언 (전 정무장관), 김윤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민섭 (전 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