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봄, 권력을 눈앞에 둔 양김은 분열했고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앗아간다. 이후 양김은 모두 5공의 탄압으로 제도정치에서 추방돼 재야인사가 되지만 양김세력의 협력도 공고해진다. 김영삼 단식이후 양김세력은 민추협과 신한민주당을 만들면서 정국의 흐름을 민주화로 바꿔놓는다. 그러나 이 시기 양김세력은 호남과 영남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지역파벌을 완성한다.
신한민주당에서 분당해 통일민주당을 만들면서 타협세력을 제거한 양김은 각자의 파벌이 갖는 강력한 결집력을 활용해 대여투쟁에 나서고, 마침내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끌어 낸다. 그러나 통일민주당은 상도동계의 영남세력과 동교동계의 호남세력이 끊임없이 물밑갈등을 벌이는 불안한 동거체제였다.
제3부 - 폭풍의 계절 ('87년 6·29선언 - '92년 대선)
87년 6월 항쟁의 값진 승리, 대통령 직선제. 이제 '후보 단일화'라는 과제만 해결하면 온 국민이 그토록 갈망하는 군정종식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YS와 DJ에게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간절하게 바래왔던 대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국민들이 나를 지지한다는 YS와 가장 힘든 민주화의 길을 걸어 왔다는 DJ. 이번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양 진영은 팽팽하게 대립되고, YS와 DJ의 대권을 향한 치열한 몸부림에 JP까지 가세한다.
이에 반해 오랫동안 정권의 권좌를 지켰던 군정은 야권의 분열을 겨냥, 3명의 힘의 균형을 적절히 조정하며 물밑으로 사조직을 동원, 자신들의 세력을 서서히 확장시켜 나간다. 결과는 3김의 패배.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시민들의 민주항쟁은 열매를 맺지 못한채 끝이 나고 양김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분열의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이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이제 야권의 통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확실하게 대권을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카드가 필요했다. 결국 대권을 위해 YS가 내린 극단적인 처방은 구국의 결단, 3당 합당이었다. 각 당의 중진조차 몰랐던 3당 합당으로 정국과 국민은 불안에 휩싸이지만 YS는 이제야 본격적인 대권레이스를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20년 동안 싸워왔던 군정과의 악수, 이에 따라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 DJ. 불신의 골은 점점 더 깊어만간다.
거여와 통합야당의 치열한 세 싸움가운데 어김없이 대선의 계절은 돌아오고…. 92년 대선, 이제 양김 외에 별 다른 세력은 없었다. YS냐 DJ냐, 두 사람의 숙명적 대결은 영호남을 등에 업고 뜨겁게 달아오른다. 결과는 YS가 승리한다. 패배한 DJ가 정계무대에서 퇴장하며 3김 시대는 막을 내리는 듯 하는데….
제4부 - 마지막도전('93년 문민정부 출범 - '97년 대선)
1) 통치권자로 변모한 민주화 세력의 시행착오
문민정부의 탄생과 국가의 통치자로서 등장한 YS. 임기 초의 절대적인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시작된 YS의 개혁은 그 운영의 미숙함으로 인해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좌초되기에 이른다. 야당 시절의 오랜 관행에 젖어 국정 운영의 독단성과 의견 수렴의 협소함을 드러내고, 근본적인 철학과 확고한 프로그램이 부재한 깜짝 스타일의 개혁은 국정 혼란과 갈등을 야기 시킨다. 거듭되는 YS의 실정은 DJ 정계복귀에 명분을 제공하고, 민주화 세력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호응은 실망과 회의로 바뀌게 된다. 오랜 시절 독재 세력에 맞서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당화된 정당의 운영 방식은 국정 운영에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2) 민주세력과 보수세력의 연대 속에 이루어진 정권교체
YS의 실정과 민주당의 약세를 명분으로 정계에 복귀한 DJ. DJ의 정계복귀와 신당 창당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야권은 또 다시 분열되고 기존의 정치 구도는 재편된다. DJ를 중심으로 정치권이 재편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모색하고자 했던 민주당의 불안한 항로는 더욱